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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ocial Entrepreneur in Wonderland * Twitter : @louiskim

인연

2007/12/23 01:06
"이것을 잊지 말게. 삶에서 만나는 중요한 사람들은 모두 영혼끼리 약속을 한 상태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야. 서로에게 어떤 역할을 하기로 약속을 하고 태어나는 것이지. 모든 사람은 잠시 또는 오래 그대의 삶에 나타나 그대에게 배움을 주고, 그대를 목적지로 안내하는 안내자들이지."

- 류시화 [지구별 여행자] 중

사실이 아니라해도 위안이 되는 말...
모든 게 그리 헛되지 않음을 안도케 하는 말...

그리고...
내 의도와 무관하게, 내가 그네들의 인생에서 맡게 될 역할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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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17 00:48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사키 요시오의 단편 <9월의 4분의 1>은 실존적인 사랑을 다루는 작품이다.

저자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언급하며 자신이 겪은 실존적인 사랑의 기억을 풀어낸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예컨대 지우개는 애초부터 뭔가 지우기 위한 물건이라는 목적을 갖고 만들어지며, 그 목적에 부합하는 기능과 특징을 가지게끔 설계되어진다. 이런 사물을 우리는 존재라 칭한다.
반면 목적도 목표도 없이, 따라서 치밀한 설계 없이 세상에 던져지는 인간 존재는 그야말로 실존적이다. 조물주가 부여한 소명과 그의 설계를 신봉하는 종교인들의 견해는 이와 궤를 달리하겠지만, 어쨌건 사르트르에게 실존은 텅빈 자유와 주체성을 핵심으로 한다. 아무 목적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인간 실존에 대한 통찰은 하이데거의 피투(被投) 개념과 맥락을 같이 한다.

어쨌거나 사르트르의 실존을 바탕으로 저자는 자신이 경험했던 사랑을 '실존주의적인 사랑'으로 규정한다. 어떻게 되어야 겠다는 목적도 목표도 없이, 그 사람이 누구여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던져진 사랑, 빠져든 사랑. 규범과 관습이 제시하는 설계도와 계획에 얽매이지 않고 그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가는 사랑.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기투(企投)하는 사랑.

영화 <연애의 목적>을 연출했던 한재각 감독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연애에 목적이란 없다. 즐거운 시간이 쌓여가는 것, 그게 바로 연애다."

물론 처음에는 실존적이라 해도 그 사랑이 끝까지 실존적이기는 힘들 것이다. 가장 쉽게는 결혼이라는 목적에서부터 집착의 충족에 이르기까지, 실존적인 방식의 텅빈 공백을 메워야 한다는 조바심을 끝끝내 버리기 힘들 것이므로...

버트란드 러셀은 행복에 이르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은 사랑의 일종이다. 인간에 대해서 따뜻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소유하기를 원하며, 언제나 명확한 반응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랑과는 전혀 다르다. 이런 사랑은 불행의 원천이 되는 경우가 많다.

행복을 가져오는 사랑은 다른 사람을 관찰하기를 좋아하고 개인들의 특성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랑이며, 만나는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거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아내려고 하는 대신, 그들의 관심과 기쁨의 폭을 넓혀주려고 하는 사랑이다. 이런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원천이 될 것이며, 그 대가로 친절을 되돌려 받을 것이다.

[행복의 정복, 버트런드 러셀]

종종 우리는 조바심과 소유욕 때문에 행복의 원천이 될 사랑을 불행의 씨앗으로 퇴락시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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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별로다. 초기작들에 비해 섬세함도 떨어지고 힘도 부쳐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행복의 조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왜 행복이 쉬 깨질 수밖에 없는지 돌아보게 한다.

보통 몸이 아프면 불행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행복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영화는 출발한다.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설정이다. 현대인의 삶이 워낙 비정상적이므로 거기서 다소 이탈하는 것 자체가 행복의 중요한 조건 하나를 마련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결핍은 삶을 일상적인 경로에서 이탈시켜 전혀 다른 가능성으로 인도하기도 하므로.  

주인공은 잠시 행복을 맛보다 다시 불행해지고 아파하고 후회하며 영화는 끝난다. 너무 전형적이고 통속적이지만 누구말마따나 우리네 삶 자체가 통속이어서 그런지 이런 낯익은 전개와 결말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너라면 어렵게 찾아 온 저 같은 행복을 지킬 수 있느냐?"

주인공이 굴러온 행복을 차버리는 건 자극에 대한 금단 현상 때문이다. 평온한 삶의 중요한 조건인 적당한 무료함과 외로움, 적막함을 견뎌내지 못하는 건 현대인이 가진 보편적인 문제일 것이다.

행복을 좀 더 오래 곁에 두기 위해선 좀더 심심한 라이프 스타일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던 계기였다


원스...

막연히 음악 영화라 생각했었는데, 스토리 자체의 매력도 만만치 않다.
엉뚱하게도 영화를 보며 부러웠던 건, 가난한 이주 노동자와 동네 전파사 수리공이 누리는 음악과 사랑이라는 호사였다. 우리 사회라면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설정. 영화를 보며 이런 사회적 조건을 먼저 생각하는 나도 참 못말리는 인간이다.

안타깝게 서로를 비껴가는 두 주인공의 엇박자 사랑 그리고 아쉬움과 함께 여운을 남기는 결말이 무척 마음에 든다. 이 정도가 상업영화가 감당할 수 있는 딱 알맞은 정도의 주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결말을 맺어주지 않은 것만해도 얼마나 황송한 일인가 ㅋ

그렇다해도 아쉬움은 남는다. 아름답고 애틋한 사랑은 맺어지지 못할 때만 성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 같아 약간은 씁쓸하다. 홍상수처럼 배짱있게 그 너저분해보이는 결말을 향해 관객을 돌진시키는 류의 영화를... 그래서 좋아하는가 보다. 비슷한 이유로 사랑에 대해 시니컬하면서도 뜨거운 시선을 들이댔던 '클로저'의 시도 역시 높이 살 만하다.

영화 속의 맺어지지 못하는 수많은 사랑이 아름다운 건, 배경음악도 흘러주고 관객들이 함께 안타까워 해주기 때문이다.이도저도 없는 현실의 맺어지지 못한 사랑은 그저 외롭고 아플 뿐인게다.

영화와 소설의 일반적 내러티브에 익숙한 우리는 항상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삶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올바른 판단과 선택을 왜곡하기 마련이다.


카모메 식당...

굉장히 정적인 영화다. 절대 혼자 봐야지... 여럿이 보다간 분위기도 망치고 영화의 매력도 놓치기 십상일 듯 하다. 커피 한잔 마시며 느긋하게 음악을 듣고 소설을 읽듯 관람해야 하는 영화다.

핀란드 인들이 여유로운 건 숲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를 볼 무렵 두 차례 정도 산행을 했는데... 그 탓에 무릎을 치며 이 얘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핀란드를 배경으로 한 일본독립영화로 손님 하나 들지 않던 주인공의 식당이 결국 만원사례를 이루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렇다해서 '식객'류의 영웅서사를 기대해선 곤란하다. 식당이라는 무대에만 국한해 본다면 향후 이런 서비스업을 해야 할 사람들이 마인드 셋 정립 차원에서 보며 좋을 것이고, 식당을 알레고리로 해석한다면 삶의 속도에 대해 생각해 볼만한 건덕지를 던지는 영화다.

역시나 삶은 단순해야 하고 다소 무미건조해야 하며 자극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외로울 필요는 없으나 그 외로움을 채우는 게 진정한 의미의 '사람'인지... (사람의 형태를 한)의인화된 물욕인지 곰곰히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세 편의 영화를 본 후 꽤나 심심해져야 겠다고, 적당히 외로워져야 겠다고 생각했다.
에 또... 까모메 식당을 본 뒤, 핸드드리핑 커피가 마시고 싶어져 사무실 커피머신을 철수시키고 핸드드리퍼 세트와 그라인더, 드립포트 등을 구비했다. 커피를 갈고 내려 마실 때마다 약간이나마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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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머프
    2007/11/29 12:43
    바쁜 와중에서도 할건 다하고 사시는것 같네요..영화평(특히, 원스)이 제가 느낀거하고는 좀 달라서 신선하기도 하고, 의외이기도 해서 푸훗~! 하며 웃기도 했답니다. 섬세함과는 거리가 있는것처럼 느껴지지만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그리고 건조한 일상들을 자알 지혜롭게 승화하며 사는데 재주가 있는것 같아요(뭐, 저의 표현이 좀 과장되더라도 걍 넘어가 주시길..ㅎ).

    오랜만에 와 보았습니다. 짧고 간결(?)하게 맺어진 인연인데 벌써 햇수로는 3년이 넘은듯(맞나?) 싶기도 하고.. 동네사람이라 칭할수 있는 정겨운 수식어가 붙음에도 불구하고 사는건 또다른 과제 더미라서 인지 좀체로 얼굴 보기도 힘든듯.. 다정다감한 아빠와 센티멘탈한 남편의 모습은 늘 간직하시리라 믿으며 장황한 안부를 여쭙고 갑니다.. 닥쳐오는 겨울엔 환상적인 스키를 타겠지요...행복은 그저 그렇게 평범함 속에서 오는건가 싶기도 하고..후후~
    • evo
      2007/11/3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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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가워요... 오랜만입니다. 지혜로움과 거리가 먼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아직 어리석고 많이 어린가봐요^^ 올 겨울에 예전처럼 다시 즐겁게 스키를 탈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암튼 반갑습니다~

그동안에도 예의 어수선한 책읽기는 계속돼 왔다. 그럼에도 어떤 흔적도 남기진 않았던 건 그냥 계속 읽고만 싶었기 때문이다. 게으른 탓이 크겠지만 읽는 족족 뭔가를 토해낸다는 것이 달갑지 않은 날들이었다. 어쨌거나 주제 사라마구와 폴 오스터가 좋아졌고 알랭 드 보통은 역시나 내 취향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오늘 얘기해보려는 책은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이다. 완성도가 높은 에세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메시지의 독창성과 진정성은 높이 사줄 만하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반대하는 담론투쟁이 십여년 넘게 계속돼 왔지만 개인 삶의 차원에서 뭔가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논의가 전무하다시피했던 상황에서 이 책은 좀 살가와 보이는 게 사실이다.
(엘리자베스 워런 모녀가 쓴 <맞벌이의 함정> 같은 책도 그 구체성과 문제의식이 돋보이는 연구 성과이기는 하나 전반적인 삶의 차원에서 접근하지는 못했다.)

제목만 보면 법정스님 류의 종교적 무소유 사상을 떠올릴만도 하다. 니어링 부부가 생각나기도 하고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더글러스 러미스)와 같은 일련의 책들이 머리 속을 스쳐간다.

하지만 이 책은 보다 실질적이고 소박한 수준에서, 달라진 세상과 그에 맞서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한다. 높은 수위의 결의, 종교적인 절제 등과는 거리를 두면서. 때문에 일반인들이 제대로 읽고 일상 속에서 작은 변화라도 시도해볼만 한 여지를 던진다.

의식주 패턴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서부터 자동차와 여행 쇼핑 자녀교육에 이르기까지, 만성적인 구조조정의 시대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기 위한 나름의 노하우 내지는 삶의 기법을 이야기 한다.

복지국가로 표상되는 대량생산과 사회통합의 좋았던 시절은 가고, 무한경쟁의 악다구니 속에서 상대적 빈곤에 시달려야 하는 독일사회의 모습도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다. 독일이 이럴진대... 복지국가의 경험을 가져 보지 못한 채 이미 정글로 들어서버린 우리에게 있어 삶의 방식과 상식을 바꾸라는 이야기는 보다 절실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논조가 어두운 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것이 기회일지 모른다고 강조한다. 풍요의 시대에 가려졌던 자연과 인간의 불화, 허영끼 넘치는 생활방식의 문제점 등이 낱낱이 드러났고 해서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는 이야기다.

견고하기 그지 없어 보이는 글로벌 자본주의도 가난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물질적 부족함을 인간적인 풍요로움으로 대체시키는 쿨한 인간들 앞에선 속수무책일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 너무 나아간걸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세상 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저항의 싸움터는 먼데 있지 않다는 사실... 바로 우리의 일상이 가장 유력한 힘겨루기의 공간일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소품이다. (사실 그 때문에 미디어가 동원된 일상의 식민화가 치밀하게 진행되는 것이겠지만...)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지음, 김인순 옮김/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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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머프
    2007/08/10 20:18
    오랜만에 이 블로그에 들어와 봤습니다..포스트 제목이 눈에 들어와서 읽었는데, 역시나 책읽기는 게을리 하지 않는군요. 소통이 너무 뜸해도 온에 마련된 집은 비어있지 않아서 반갑기도 하고 그렇네요. 더구나 에보와 저와 같은 인연은 더욱이...가을이 오려고 하는지 웬지 더욱 쓸쓸한 기분을 감출길이 없네요. 혼자놀기가 아직은 서툴러서 이기도 하겠지만..^^
    • evo
      2007/08/11 01:27
      댓글 주소 수정/삭제
      오랜만입니다. 반가워요^^
      책읽기는 게을리하지 않는데, 독서일기는 엄청 건너 뛰었네요... 그런데 웬 가을타령 이십니까... 아직 무더위가 가실려면 멀었습니다 ㅠ.ㅠ

마스터즈 토너먼트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골프대회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출전자격도 굉장히 까다롭다. 그래서 출전 자체를 다들 영광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우승자는 저 유명한 '그린 자켓'을 입고 시상대에 오르게 된다. 필 미클슨은 두 번을, 타이거 우즈는 네 번 입었으며... 니클러스는 여섯 번에 걸쳐 이 그린자켓을 걸치고는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이 마스터즈 대회가 열리는 장소는 처음부터 줄곧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이다. 조지아 주 아틀란타에서 자동차로 4시간 거리에 자리한 유서 깊은 명문 클럽인 오거스타 내셔널은 마스터즈를 위해 존재하는 클럽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최상의 대회 컨디션을 위해 몇 달 씩 클럽을 폐쇄하고 수시로 코스 레이아웃을 바꾸고는 한다니 말이다.

오거스타 내셔널을 건립하고 마스터즈 대회를 창설한 인물이 사실은 오늘 얘기의 주인공인 셈인데... 소개가 늦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바비 존스(Bobby Jones).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골퍼인데 무엇보다 그는 끝까지 아마추어로 남았다. 물론 그가 활약했던 시대에는 프로선수의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다해도 모든 상금을 포기해가며 아마추어로 남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바비 존스는 그랜드 슬램이라는 역사적인 위업을 달성한 최초의 골퍼였고 그 목표를 달성한 후 곧바로 은퇴를 선언했다.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 그를 따라다닌 아틀란타 지역신문의 기자인 O.B 킬러가 은퇴한 바비에게 이렇게 묻는다. "자네는 우리를 위해 위대한 업적을 세웠고, 어머니를 위해 하버드에서 문학학위를 땄으며, 아버지를 위해서 변호사가 됐지. 그리고 이제 아내를 위해 은퇴를 했네... 그런데 자네 자신을 위해서는 무얼 할건가?"

바비는 대답 대신 아틀란타의 황무지를 보여준다. 그 자신을 위해 여기에 골프클럽을 만들고 오거스타라 칭할 것이라며... 1932년의 일이다.

바비 존스가 정말로 그 이후 자신을 위해 삶을 살았는지, 오거스타를 통해 얼마만큼의 만족을 경험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허나 분명한 것은 그가 골프역사에 전무후무한 족적을 남긴 아마추어 골퍼이며 자기 목표와 세상의 기대 그리고 가족의 행복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그 모두를 조화롭게 이어갔다는 점이다. 그게 부럽고 또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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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 밀그램(S. Milgram)은 감각의 과부하가 도시 스트레스의 근원적 원인이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 밀그램의 자극 과부하 이론의 타당성이 확인됨으로써, 그의 이론은 1970년대 도시 거주자들뿐만 아니라 1997년의 데이터 스모그 희생자들에게도 적용 가능하게 되었다. 도시 거주자들이 일상적 삶 속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엄청난 자극의 포화에 직면하게 됨에 따라, 이 이론은 수십 년 동안 발전해 온 정보화 시대의 특징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 데이비드 솅크,『데이터 스모그』】

스탠리 밀그램은 참 재미 있는 연구를 많이한 학자였나보다. 많이 알려져 있는 여섯단계이론, 캐빈베이컨 게임 같은 것도 바로 이 양반에게서 나온 이론이다.

어쨌거나 갑자기 이 구절이 생각난 까닭은 오늘 읽은 테드 창(Ted Chiang)의 단편소설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 때문일 것이다.

정말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경험을 갖게하는 이 독특한 소설은 상업주의에 물든 현대인의 미의식을 통렬하게 고발한다. 단순한 고발에 그치지 않고 철학적인 사유의 발판 또한 마련해 놓았다는 점 역시 이 소설이 갖는 미덕이다. 

두뇌기능 및 구조 연구에 대한 의학적 연구가 무르익은 미래의 어느 시점, 가상의 한 대학에서 벌어진 논쟁이 내용의 골격을 이룬다. 그 중심에는 '칼리그노시아'라는 생소한 (의료)조치가 자리한다.

칼리그노시아는 실미증(失美症)을 의미하는 조어로 여기서는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지배적인 판단의 요소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뇌의 특정 기능을 인위적으로 마비시키는 조치를 가리킨다. 이 조치를 자기 대학 학생 전체에게 의무화 해야 한다는 쪽은 '철저한 평등을 요구하는 학생회의'고 전미 칼리그노시아 협회 등이 이를 옹호한다.

이들이 칼리의 의무화를 주장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루키즘'에 대한 문제제기, 또 초자극적/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무기로 사람들의 신경계를 혼란시키는 상업주의에 대한 태클인 것이다.

칼리 의무화에 반대하는 진영은 다소 세력분포가 복잡한데...
일단 가장 저열하게는 화장품업계 등이 만든 사이비인권단체 등이 눈에 띈다.
이들은 당근 칼리 시술을 의무화하려는 조치에 극렬히 반대하고 반대의견의 선동을 위해 돈을 주고 학생들을 고용하기도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서너명의 교수들은 전공을 망라하고 모두 칼리 시술에 반대입장을 피력한다. 반대의사의 강도나 신중성의 정도에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아무튼 이들이 주된 반대 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다. 지나친 자극이 문제인 것은 확실하나 인위적인 조치를 통해 자극으로 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입장. 결국은 교육이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겠냐는 지극히 학자적인 신중함을 엿볼 수 있다.

어쨌거나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현실감 넘치게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테드 창의 구성적 솜씨가 돋보이고 그 기반이 되는 철학적 사유와 과학적 지식 또한 일품이다. 

창작노트에서 테드 창은 자신 역시 찬반 사이에서 확실한 입장을 정하지는 못할 것 같다면서도 칼리 시술 같은 게 개발된다면 한 번 시도해보고 싶다는 식으로 문제의식의 일단을 드러낸다.

나로선 테드 창보다 좀 더 적극적인 입장에 서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래 전부터 미디어로 인한 각종 자극이 우리네 삶의 엔트로피를 끊임없이 높여 가고 있다는 사실이 분노스럽기까지 했으니까.
글쎄... 어찌보면 정말로 무서운 발상일수도 있고... 전체주의적인 냄새가 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인위적인 통제까지도 필요한 긴급한 상태로 현대사회가 매일매일 빠져들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진짜 맘 같아서는 미친 방송들과 광고들을 통제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덧] 티스토리 왜 이러냐 이거... 올만에 글 올리려 했는데 며칠 전부터 글이 안 올라간다.
      유독 내 놋북에서만!!! 저장이 안됐다는 경고창만 뜬다 ㅠ.ㅠ 이를 우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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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형주
    2007/03/13 21:17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세상구경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2. 류크
    2007/06/20 21:17
    잘보고감

추석을 지내고 다시 바쁜 일상과 마주하게 됐다.
동시대인들과 비교해봤을 때, 물리적으로 촉박하게 사는 건 분명 아니다.
그렇긴해도 여러가지 일들이 오버랩되며 몰려드는 건 사실이고 그럴 때 어김없이 찾아드는 꿀꿀한 기분 때문에 마음이 다소 무거운 요즘이다.

LPGA 커미셔너를 지낸 왕년의 키다리 골프여제 캐롤 만은 "(자신이 선택한 많은 일들이) 너무 조각조각 나눠진 나머지 아무 것도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에 지치고 화가 났으며, 무례하고 굴었고 (그 결과) 생활이 불행해졌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그녀만큼 다재다능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 기분만큼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게 요즘 내 상황이다.

읽고 싶은 책도 많고 가고 싶은 전시회도 꽤 되고... 만나고 싶은 얼굴도 꽤 여럿 아른거린다.
무작정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한참 내달리다가 휴게소에 들러 우동 한 그릇 비우고 싶은 생각도 간절하다.
가벼운 차림으로 자전거에 올라 한 쪽 어깨에서 달랑거리는 카메라의 둔탁한 촉감을 느끼며 도시 구석구석을 누비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다. 다행히 여전히도 나의 소망들은 지극히 소박하여 하루 이틀 정도 온전히 일상을 털어버릴 수만 있다면 못할 것도 없는 일들이라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다.

가끔은 이렇게 소박해져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가슴 한 구석에서 꿈틀대기도 한다.
어린 시절 읽은 위인전에서부터 끊임없이 꿈을 찍어대는 대중문화, 갈수록 그 위세가 비등하고있는 각종 성공과 성취의 신화들이 (무)의식 속에 켜켜이 퇴적된 탓일게다.

이런 앙금마저 멀끔히 씻어내는 순간 나는 과연 무엇을 보게 될까? 인생에서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하게 될까? 그게 바로 득도인가? 허나 득도마저도 부담스러운 이 소시민은 그 때문에 저런 부유물 또는 퇴적물들과도 가끔 조우하며 사이 좋게 지내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하여 지금 하는 일들이 술술 잘 풀려 가끔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맘에도 없는 겸양의 제스처를 취해보고 싶기도 하고 스코틀랜드의 유서 깊은 링크스 코스에서 라운딩하는 호사를 누리게 되면 괜찮을 것 같다는 맘도 품어본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고 싶은 일은 매주 하루 날을 잡아 나를 보러 와줄 지인들에게 맛있는 점심을 대접하는 일이다. 메뉴를 선정하고 약속을 어레인지하고 반갑게 만나 인사하고 유쾌하게 웃으며 식사를 나누고, 그렇게 두 시간 정도가 흐른 뒤 기쁘게 음식값을 치르며 나는 무척 즐거울 것 같다.

두서 없는 글은 이쯤에서 마치는 게 좋을 듯 하다. 더 하다간 그야말로 한 없이 이어질 것 같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쓰고나서 제목란을 채웠다. 점심 먹어주는 남자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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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olot
    2006/10/11 15:53
    슬슬 풀리기 전에 지금이라도 점심 먹어줄 수 있다. 기쁘게 음식값을 치르게도 해줄께... 여기 경치 좋으니까 삼청동으로 나와라 ㅎㅎ
    • evo
      2006/10/12 22:37
      댓글 주소 수정/삭제
      안 그래도 삼청동 갈 일이 있기는 한데... 다음 주쯤 전화 때릴게


간만에 망원렌즈를 달고 샷을 날려봤다. 오랜만이어선지 감흥이 새로웠다.
한 때는 광각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가 또 한 때는 50mm 표준(단)렌즈... 그러다가 망원, 한 바퀴 돌아 다시 광각... 뭐 이런식으로 구도와 화각에 대한 기호는 돌고 도는가 보다. 골프에서도 드라이버가 잘 맞았다가 어느 날은 아이언이 잘 맞고 또 어떨 땐 퍼팅이 잘 돼 그린에서만 펄펄나는 것 마냥...

APO는 생각보다 훌륭한 렌즈였다. 명성은 익히 들어왔으나 직접 찍어 보니 가히 명불허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백통(캐논의 대표적 망원 줌 렌즈) 가격의 7분의 1에 불과한 가격이나 두 렌즈 모두 찍어 본 나로선 그만큼의 가격차를 합리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빛이 충분한데 렌즈가 좀 어두우면 어떻고, 손떨림쯤이야 보정이 안되면 또 어떤가. 모두가 스포츠 사진 기자 노릇 할 것도 아닌데 신속하고 조용한 오토 포커싱은 그야 말로 바로크적 오바 아닌가.

사실 APO의 매크로 기능을 시험해보고자 위와 같은 접사 비스무리한 샷을 날렸으나 뭐니뭐니해도 망원렌즈의 매력은 일반적인 배율에서는 도드라지지 않는 피사체 간의 관계를 재구성하는데 있다. 객관적인 화각으로는 포착될 수 없는 미묘한 관계망을 망원은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구성해 보여준다. 예컨대 부대 안으로 멀어져 가는 애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여인의 뒷모습은 광각이나 표준렌즈가 아닌 망원의 화각 속에서 더 정당하게 묘사될 수 있다.

그러고보니 삶을 대하는 우리의 관점 역시 그때 그때 줌인과 아웃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복잡하기 짝이 없고 감정은 미묘하기 이를 데 없으며 관계는 그야말로 실타래 처럼 얽혀 있는데 단렌즈처럼 바라보며 산다는 건 너무 무모하지 않나 말이다. 많은 이들이 하나의 화각으로만 세상을 대하려 하기에 세상살이가 좀 더 복잡해지고 피곤해지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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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과 아무 생각없이 논다.
; 착하고 귀엽게 굴 땐 더 할 나위 없이 기쁘고, 울고 떼를 써도 그거 달래느라 딴 생각이 달아난다

가장 고답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적당히 현실을 비웃어주는 책을 골라 읽는다.
; 물론 잡생각이 안 들게끔 재미 또한 어느 정도는 보장돼야 한다

블로그와 가족 홈페이지를 뒤지며 추억에 빠진다.
; 이거 의외로 재미가 쏠쏠하다. 단순한 재미뿐 아니라 지나온 삶을 반추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얻게 된다. 역시 뭐든지 삼년 이상 꾸준히 하게 되면 쓸모 또한 절로 생긴다

차분히 앉아 글을 쓴다.
; 떠오르는 생각을 마구 자판으로 두드려내는 작업은 의외로 속시원하다. 글을 잘 쓰고 말고는 이미 중요치 않다. 내겐 그저 '치유로서의 글쓰기'일 뿐이다.

아내와의 섹스
; 말할 것도 없이 최고의 처방이지만... 아내는 요즘 둘째가 독점하고 있다 ㅠ.ㅠ

운동
; 등산도 좋고, 자전거 타기도 좋다. 여럿이 해야 하는 구기종목은 별로다. 골프의 경우 공이 잘 맞으면 효과가 크지만 공마저 안 맞으면 그야말로 설상가상...

운전
; 비오는 날, 맑은 피아노곡을 평소보다 크게 틀어 놓고 느린 템포로 운전하면 머리가 맑아진다... 과속은 금물

맛있는 식사
; 평소 가보고 싶었던 음식점을 찾아 먹고 싶었던 음식을 맘껏 음미한다. 평소 보고 싶었던 친구가 동석한다면 그 이상 좋을 수가 없을 게다.

이쯤 쓰고 나니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마음이 옹졸하다보니 평소 이 정도 응급처치 노하우는 갖고 살아야 한다.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이 험한 세상에서 나름대로 촘촘한 안전망을 구비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이런 단순함도 많은 도움이 된다ㅎ).

어찌어찌하여 여기까지 글을 읽은 사람은 자기만의 방법을 댓글로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쉽게 써먹을 수 있는 근사한 방법을 모르고 있음 '화'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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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머프
    2006/09/26 12:13
    저하고 몇가지 비슷한 부분(블로그 뒤지기, 운동하기, 글쓰기, 맛있는 식사..)은 있는데, 제가 가장 선호 하는 부분은 빠졌네요..아마도 무엇인지 말안해도 알것 같은데요?^^ 酒님&벗들과 놀기...ㅋ
    언젠가 에보가 제게 한 말(술마실돈 있으면 책을 사서 봐라!)이 늘 머릿속을 맴돌고 있어서 사실, 자제해 보려는 노력은 합니다만, 그게 또 나름의 원동력이 되다보니 잘 안되더라구요. 요샌 진짜로 술마시는 돈이면 책은 몇권은 더 사보겠더라구요..절실절실..
    참! 글구, 사무실이 어디쯤인지 언제 제가 개업 기념蘭이라도 들고 찾아가 볼 수 있는지..알려 주세요! 빌려주신 책도 돌려 드릴겸..
    • evo
      2006/09/26 14:12
      댓글 주소 수정/삭제
      蘭이라뇨! 거적문에 돌쩌귀임돠 ㅋ
      안그래도 책 돌려 받아야 하는데... 편한 시간 알려주세요^^
  2. 스머프
    2006/09/26 15:36
    내일(27일) 점심시간도 괜찮고, 아니면 다음주 월요일과 화요일 좋습니다.^^

얼마 전 동원훈련에 다녀왔는데, 해당부대에서 메일 한통이 왔다.
메일에는 서너쪽짜리 파워포인트 자료가 첨부돼 있었고, 이번 동원 훈련을 나름대로(?) 결산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꼭 그 메일이 때문이 아니라 매년 예비군 훈련때마다 격세지감을 느끼고는 했다.
현란한 기교를 자랑하는 파워포인트 문서와 동영상 기법들이야말로 그 자리에 총'동원'되고 있었기 때문에 ㅋ.
아닌게 아니라 학교에 오래 남아 있던 까닭에 몇 해에 걸쳐 선후배 동기들의 제대를 맞이했는데 90년대 중반 제대한 행정병 출신들이 고작 한글 편집에 능했던데 비해 해가 갈수록 다양한 문서프로그램에 고도의 숙련도를 익힌 예비역들이 배출돼 놀랐던 기억이 난다(실제로 99년 말 치러진 단과대 선거 때는 갓 제대한 선배 한 명과 함께 후배들의 자료집을 통째로 편집해 주기도 했다. 당시 그가 보여준 현란한 단축키 조작 손놀림은 아직도 경이로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디 문서프로그램 뿐인가. 21세기에 제대한 이들, 주로 후배들은 포토샵 같은 이미징 프로그램이나 액세스 같은 데이터베이스까지 못 다루는 게 없었다. 그렇게 몇 년 새 축적된 기량들이 우리 예비군들 앞에서 총동원 되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90년대 중반만 해도 학교에서 파워포인트를 작성할 일은 거의 없었는데 경영학과를 중심으로 파워포인트 작성이 확산되었고 내가 학교를 떠난 직후부터는 전공을 망라하고 거의 전 수업에서 파워포인트가 주된 매체가 된 모양이다. 대학 수업에서 조모임이 활성화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
얘기를 늘어놓다 보니 생각나는 게 있는데... 98년 연대 총학선거에서 화제를 뿌리며 당선된 소위 비권 친구들이 자료집 전체를 파워포인트 유인물 스타일로 제작해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 친구들이 (내용과는 무관하게)현명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대학선거에서 당연시 되던, 기획사에 위탁한 화려한 잡지식 자료집 편집은 불필요한 낭비였음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웃겼던 것은 몇 차례 선거에서 재미를 보고 세를 확장한 비권 친구들이 어느새 운동권의 낡은 세련됨을 추종했다는 사실이다. 허기사 그들의 존재 자체가 신기루 아니었겠나.

2000년 사회에 진출한 내가 가장 맘에 들어했고 가장 많이 활용했던 프로그램도 파워포인트였다.
재무쪽으로 갔었다면 엑셀에 매료됐겠지만 마케팅으로 첫삽을 뜬 까닭에 파워포인트와의 열애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고나 할까. 그 해 파워포인트로 수백장의 프로젝트 제안서, 제품 소개서를 작성하면서 보냈던 수많은 밤들, 그리고 권위주의란 무엇인가를 정말 단적으로 보여준 모 재벌 총수 앞에서의 프리젠테이션의 기억을 지금은 그저 헛헛한 웃음과 함께 떠올릴 뿐이다.  

프리젠테이션과 관련해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순간은 뭐니뭐니해도 처가 어른들께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갔던 날일 것이다. 2001년 9월 이었고 9.11 테러 직전 인지 직후인지는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그 무렵이었던 건 확실하다. 결혼을 목전에 두고 이렇게 난리가 나는 건가, 하는 노인네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었으니까 ㅎㅎ.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어 곤란했던 탓에 딴에는 결혼 승낙을 구하러 가는 그 자리에서 알량한 프리젠테이션 역량이라도 보여드리면 어떨까 짱구를 굴렸던 게다. 전술적으로도 현재 가시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보다는 미래를 들먹여야 하는 것의 비중이 월등히 높았기에 프리젠테이션 형식을 빌어 다소 공격적으로 어프로치 하는 게 나아 보였다. 또 무엇보다 노트북이며 빔 프로젝터 등의 장비를 동원하는 게 그분들의 냉철한 판단력을 잠시 흐리는 데 도움이 될 것도 같았다 ㅎㅎ
확실히 이제와 다시 생각해봐도 프리젠테이션은 진실의 언어보다는 가식과 포장의 언어에 더 적합한 방식임에 분명하다. 누군가 당신을 앞에 두고 프리젠테이션을 하려 한다면 일단 그를 의심해도 좋다는데 십만원을 걸겠다^^

내용 역시 거창하기 짝이 없었다. 겸손함을 가장해 나를 포장하기, 같은 말이라도 '생애 계획' 뭐 이런 식으로 정식화하기, 현실의 온갖 악조건을 거세하고 희망적인 변수들만 조합해 상승곡선의 그래프 그리기 등등. 당시 내가 알고 있던 알량한 마케팅 지식이 총망라된 정말로 조잡하고 뻔뻔한 내용의 프리젠테이션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내와 정말 결혼하고 싶고, 그녀와 함께 행복하고 싶다는 나의 진심만은 빼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의사소통만큼 힘든 게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현란한 기법과 대화술 청중을 다루는 솜씨 등이 아무리 발달한다 하더라도 프리젠테이션은 일방적인 쇼에 그치고 말 것이다. 진정으로 타인의 입장과 시선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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